20세기 초·중반은 기독교 역사에서 유례없는 전환기를 맞이한 시대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공산주의와 세속주의의 확산, 과학적 합리주의의 득세는 전통적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담아온 복음과 성경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당연한 권위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철학과 과학이 신앙을 대체할 수 있는 진리 체계로 부상하는 가운데, 기독교는 방어적이고 변증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개혁주의 진영은 단순한 방어 논리를 넘어서, 신앙 안에서 이성을 재해석하고 그 자체로 지성적 기초를 세우는 ‘신앙적 이성’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고전적 변증학이 외적 증거와 논증을 중심으로 했다면, 현대 개혁주의 변증학은 신자의 내면과 신학적 세계관 전체를 아우르는 변증적 접근을 개발했습니다. 이는 신학자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고든 클락(Gordon Clark), 존 프레임(John Frame)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 계시 중심의 변증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다음은 이 네 인물의 신학적 특징과 그들이 이룬 변증학의 지형에 대한 자세한 고찰입니다.
1. 반 틸과 전제주의 변증: 신앙 기반의 철학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은 20세기 개혁주의 변증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기존의 고전적 변증이나 증거주의적 접근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전제주의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변증 방식은 논증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신학적 전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모든 인식과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인간은 중립적인 상태에서 진리를 탐색할 수 없으며, 누구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특정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지입니다.
반 틸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유일하게 모든 경험과 이성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특히 칼 바르트의 개시 중심 신학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바르트가 개시와 계시자의 실재를 철저히 구분하며 하나님의 절대타자를 강조한 점에서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반 틸은 오히려 개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인간 이성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변증의 목적을 불신자를 ‘설득’하는 데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변증은 믿는 자가 하나님의 계시 앞에 겸손히 반응하고, 세속적 사상의 허구성과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무신론자가 ‘이성’을 근거로 기독교를 비판할 때조차, 그 이성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 없이도 일관된 논리나 도덕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모든 철학은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의 영향은 프란시스 셰퍼, 그렉 반슨 등 이후 개혁주의 변증가들에게 계승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복음 중심의 변증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틀이 되었습니다.
2. 플랜팅가와 합리적 신앙: 내적 일관의 탐구
20세기 후반, 개혁주의 변증학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입니다. 그는 전제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철학의 언어를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 신앙이 철학적 비판에 견딜 수 있는 체계를 가질 수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플랜팅가의 대표적인 기여는, 신앙이 비이성적이거나 맹목적이 아니라, 내적 정당화(warranted belief)가 가능한 합리적 신념이라는 점을 철학적으로 증명하려 한 데 있습니다.
플랜팅가는 고전적 인식론의 구조—정당화, 진리, 신념—를 확장해, 신앙이 '인지적 기능'에 따라 형성된 신념이라면 타당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조건 아래서 형성된 신앙은 정신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이며, 비판에서 방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신앙과 이성의 긴장이 아니라 상호 보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논지는 그가 대표적으로 다룬 '기본 신앙(basic belief)' 개념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다른 철학적 가정들—예: 타인의 존재, 기억의 신뢰성 등—처럼, 증명 이전에 ‘정상적 사고’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기본 신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무신론이나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신앙을 공격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전제에 대한 정당화를 하지 못한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나 데닛과 같은 신무신론자들은 인간 이성의 진화적 기원을 주장하지만, 진화가 오직 생존을 위한 기능이라면 왜 인간 이성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반면,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진리 추구 능력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플랜팅가의 변증학은 이처럼 ‘반응적 방어(apologetic defense)’에 무게를 두며,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합니다. 이는 전제주의적 비판과는 다른 지점에서, 현대 철학 내 신앙의 위치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고, 개혁주의적 변증학의 외연을 넓혔습니다.
3. 클락과 성경적 이성: 인식론적 확신
고든 클락(Gordon H. Clark)은 개혁주의 진영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성경 중심 변증학을 제시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전통적 의미의 ‘이성(reason)’과 ‘경험(empiricism)’을 철저히 비판하며,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적 계시뿐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흔히 성경적 합리주의(Biblical Rationalism)로 불리며, 개혁주의 인식론의 한 분파로 자리잡게 됩니다.
클락은 인간의 이성 능력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이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선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성은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성경의 논리적 체계를 받아들이고 해석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모든 지식과 인식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것은 참된 지식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그의 대표 저서인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전반에 걸쳐 체계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 심지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며, 성경 이외의 어떤 ‘진리 체계’도 자율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개혁신학 내의 논의에도 과감히 도전하며, 일반 계시조차도 특별 계시(성경)의 빛 아래 해석되지 않으면 불완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반 틸과의 신학적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클락의 공헌은 분명합니다. 그는 성경을 단지 권위 있는 문서로 보지 않고, 이성의 최종 기준이자 논리 체계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모든 변증의 출발을 인간의 논리가 아닌, 성경의 명제 진술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런 방식은 단순히 ‘성경을 믿자’는 권유가 아니라, 성경 외에는 진리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기초한 논리 체계입니다.
4. 프레임과 변증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존 프레임(John M. Frame)은 현대 개혁주의 변증학에서 철학, 신학, 윤리를 유기적으로 통합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변증 자체를 신학적 예배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즉, 변증은 신자의 지성적 설득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glory to God)”가 그 중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프레임은 변증학을 철저히 성경 계시 중심의 사역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인간 이성의 기능을 긍정하면서도, 이 이성은 언제나 성경 계시를 바탕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삼중 관점(the tri-perspectivalism)’은 진리 인식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 인간의 내적 확신, 삶 속 실천이라는 세 관점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반 틸의 전제주의와 클락의 성경 절대주의를 종합하여, 변증이 실제 삶과 공동체 안에서 작동해야 함을 보여준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고전적 변증 방식—예: 신 존재 논증, 도덕 논증—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고, 성경적 틀 안에서 도구적 사용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즉, 특정한 이성적 논증들도 복음 전도와 사역 안에서 일정 부분 유익할 수 있으며, 다만 그 기준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은 지성적 일관성을 넘어 존재론적 복종을 요구한다"고 말하며, 이성의 정당성이 아니라 복음 앞에서의 순종을 변증학의 참된 결론으로 보았습니다.
프레임의 변증학은 이처럼 설득이 아닌 예배, 논증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반응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는 현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상적 도전에 대해 복음 중심의 방향성을 유지하며, 실천적 응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틀이 됩니다.
출처:
1)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2) John Frame, Van Til: The Theologian as Apologist
3) John M. Frame, Apologetics to the Glory of God
4) Alvin Plantinga, God and Other Minds
5) Alvin Plantinga, Warranted Christian Belief
6) Paul Copan, Faith in Reason: Argument for Christian Commitment
7) Gordon H. Clark,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8) Harry Reeder & Jamie Soltr, With Reverence and Awe
9) Brian Gritsch, Cornelius Van Til: Reformed Apologist and Churchman
10) Scott Oliphint, Reasons for Faith: Philosophy in the Service of 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