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도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시며,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시려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표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계시(Revelation)는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모든 근거입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 스스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오직 계시에 의존하는 신학입니다.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성경을 계시의 핵심 통로로 이해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말씀이라는 고백은 모든 신학의 뿌리를 이룹니다. 하지만 계시는 성경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 이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고, 인간의 양심 속에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계시를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 분별력의 출발이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계시를 자연계시, 특별계시, 그리고 정경성의 흐름으로 나누어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고, 교회는 그 계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역사와 신학의 관점에서 함께 고찰하겠습니다.
1. 자연계시: 하나님의 흔적을 따라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계시(General Revelation)는 특별한 민족이나 신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허락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식입니다. 자연계시는 창조 세계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전 인류와 만물을 대상으로 자신의 존재와 성품의 흔적을 남기신 통로입니다.
시편 19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노래합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이 관찰한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과 질서 속에 하나님의 존재가 반영되어 있다는 직관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로마서 1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하며,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드러났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러한 자연계시는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덕적 양심을 통해 선과 악의 구별을 직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자연계시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합니다. 루터와 칼뱅은 자연계시가 존재하되,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해석하거나 구원의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줄 수는 있어도, 구원의 방식을 알려주는 데에는 무력합니다.
J.N.D. Kelly는 초기 교부들 또한 자연계시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이 계시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해진다고 이해했음을 설명합니다. 예컨대 유스티누스 마르터는 그리스도의 ‘씨앗’(spermatikos logos)이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Pelikan 역시 자연계시를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증언하는 언어”로 표현하며, 이는 특별계시를 향한 신학적 서곡임을 지적합니다.
자연계시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만으로는 복음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더욱 분명한 계시, 곧 특별계시가 필요합니다.
2. 특별계시: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
자연계시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 흔적이라면, 특별계시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자기 드러내심입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과 구원의 길을 명확하게 알려주신 계시로서, 특정한 시기와 장소, 특정한 인물을 통해 전달됩니다. 특별계시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인격적 만남과 역사 속의 행위로 나타나며, 이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따라 전개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특별계시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음성,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 선지자들을 통한 말씀은 모두 특별계시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약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완성됩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특별계시의 절정이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는 구절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특별계시의 목적을 구속에 둡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수단이며, 구속사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루터와 칼뱅은 이 계시가 단지 가르침이나 명령이 아닌, 약속과 은혜의 사건임을 강조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의 심령에 의해 확증되며,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이 계시조차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 특별계시의 유일한 기록이며, 따라서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서가 아니라 계시의 정점으로서의 권위를 가집니다.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록하셨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성경이 무오하고, 충분하며, 권위를 가진 말씀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이해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신학 중 하나였으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리가 그 신학을 뒷받침했습니다.
Pelikan은 특별계시를 “하나님의 존재가 그 자체로 인간의 역사를 뚫고 들어온 사건”이라 표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가 단지 ‘교리의 내용’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Kelly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의 고백이 단순한 경건의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시의 수용이었음을 지적하며, 이 고백들이 후대 교리의 중심을 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계시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이 말씀을 보존한 경전입니다. 신학은 이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교회는 이 말씀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내는 공동체입니다. 특별계시는 따라서 신학의 중심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신자의 삶의 표준입니다.
3. 성경의 정경성: 계시의 기준과 권위의 형성
기독교 신학에서 정경성(Canon)은 단지 ‘책의 목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정경은 교회가 어떤 문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즉, 정경은 계시된 말씀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동시에, 교회가 어떤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갈지를 결정짓는 신앙적 울타리입니다. 정경성의 개념은 단순히 문헌학적 판단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적 자기이해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정경은 초대교회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권위를 인식하고 인정한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만들었고, 교회는 그 말씀의 권위를 인식해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성경의 권위를 단순한 역사적 결정이나 전통적 수용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분명한 대답입니다.
구약 정경은 이미 예수 당시 유대 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합의가 있었으며, 신약 성경은 사도들의 권위 아래서 점차 형성되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의 정경화는 1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이 작용했습니다. 첫째, 사도성(apostolicity)—저자가 사도이거나 사도의 직접적 제자여야 한다는 점, 둘째, 보편성(catholicity)—초기 교회 전체에서 널리 사용되었는가, 셋째, 정통성(orthodoxy)—기존의 사도적 신앙과 일치하는가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단순한 문서 분석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과 실천 속에서 계시된 말씀을 분별하고 확증하려는 신학적 행위였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성경 정경화 과정을 “교회가 성령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식별한 역사”라고 표현하며, 이는 성경의 권위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자체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Pelikan은 이 과정이 단지 고대 문서들을 ‘분류’한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고 그에 복종하려는 공동체의 신앙적 결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교회가 정경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정경이 교회를 규정하고 형성했다고 강조하며, 이 점이 교회의 신학적 자기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합니다. J.N.D. Kelly 역시 신약 정경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며, 초기 교회가 단지 사도적 전승을 보존하려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정수를 담은 문서를 중심으로 신앙의 경계를 지키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러한 정경성의 의미를 신학의 기초로 삼습니다. 정경은 곧 계시의 경계이며, 신학의 권위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오직 정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정경 외의 문서나 체험, 전통은 결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 핵심 원리의 출발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정경성은 여전히 중요한 신학적 논점입니다. 왜 어떤 문서는 포함되고 다른 문서는 배제되었는지, 우리는 어떤 근거로 성경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정경성 논의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그 권위를 증명한다.” 이는 외적인 증명이나 교회 권위 이전에,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그것이 역사와 공동체를 통해 드러났다는 확신입니다.
계시는 기독교 신학의 토대이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은혜의 방식입니다.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의 질서를 모든 인류가 알 수 있도록 하셨고, 특별계시를 통해 그분의 구속 계획과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셨으며, 이 계시가 기록되고 보존된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정경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계시에 의존해 하나님을 알고, 신앙을 고백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정경은 단지 과거의 문서 모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생명력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언제나 정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성경 외의 그 어떤 전통도 이 말씀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신앙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 삽니다. 이것이 곧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며, 참된 신학의 자세입니다.
출처:
1) 루이스 벌코프, 『기독교 교리사』
2) 조병하, 『세계역사 속의 그리스도교 역사』
3)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