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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정통 교리의 수호 (이단, 공의회, 신경)

by 차곡지기 2025. 6. 11.

교회와 정통 교리의 수호 (이단, 공의회, 신경)

 

기독교 신학에서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워진 신앙 공동체이며, 진리를 보존하고 선포하는 사명을 위임받은 집단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말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세상에 전하고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외적으로는 박해를 받았고, 내적으로는 끊임없는 이단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고백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정통 교리와 신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교회는 시대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사상과 이념 속에서 바른 교리를 지키고, 왜곡된 복음에 맞서 싸우는 신학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이단에 대한 분별, 공의회를 통한 교리 수호, 그리고 신경을 통한 정통 고백이라는 세 측면을 중심으로 교회가 어떻게 정통 신앙을 지켜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단지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지키는 영적 전선의 중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1. 이단: 교회를 흔든 거짓 복음의 도전

기독교 교회는 초대 시절부터 이단(heresy)의 도전에 끊임없이 직면해 왔습니다. 이단은 단지 ‘조금 다른 의견’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신자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오류입니다. 이단은 종종 경건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주장으로 등장하지만, 실상은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 은혜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뒤흔드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은 없으나, 어떤 이들이 너희를 요란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7)고 경고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으로 보고, 예수의 육체성을 부정했으며, 도세티즘은 예수가 실제로 육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영(幻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성자의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단을 “진리의 왜곡일 뿐 아니라, 교회를 파괴하고 신자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영적 전쟁의 형태”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특히 이단이 언제나 ‘성경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한다고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예수가 피조물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단에 맞서기 위해 성경에 근거한 정통 교리를 명확히 하고, 신앙 공동체 안에 바른 가르침을 세우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단순히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무엇이 옳은가를 명확하게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정통은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뚜렷해졌으며, 교회는 고난과 논쟁 속에서 진리를 더 깊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Pelikan은 교회가 이단에 대응하며 발전시킨 교리 체계를 ‘위기 속의 정밀화’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단이 단지 문제라기보다는, 교회가 스스로 믿는 바를 더 분명히 규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J.N.D. Kelly 또한 이단과의 논쟁이 교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며, 초대 교부들이 단지 반박에 그치지 않고,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을 체계화함으로써 정통 신앙을 공고히 했다고 평가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단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과거처럼 교리 논쟁의 형태만이 아니라, 심리적 위로, 성공 신화, 자기 계발의 옷을 입은 왜곡된 복음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것’보다 ‘진리를 지키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며, 신자 개개인도 바른 교리를 배우고 분별력을 갖추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단은 교회를 흔들지만, 정통은 교회를 세웁니다. 이단을 분별하고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공동 사명이며, 교회는 이를 위해 말씀과 교리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2. 공의회: 교리의 경계를 세우다

초대 교회는 이단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적인 논의와 판단이 필요해졌고, 그 중심에서 공의회(Ecumenical Council)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단순히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신앙의 본질을 공동으로 분별하고 고백하는 자리였습니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역사적 시점마다 교리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정통 신앙을 확증하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공의회는 AD 325년에 소집된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이 회의는 아리우스가 주장한 "예수는 피조물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본질상 동일하다(homoousios)는 고백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단지 예수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을 세우는 결정적인 분수령이었습니다. 이후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을 명확히 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정교하게 정립했습니다.

공의회는 단순한 토론장이 아닙니다. 당시의 회의들은 성경 해석, 교부들의 가르침, 예배의 전통, 공동체의 신앙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리를 수호하려는 신학적 투쟁의 장이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공의회를 “신앙 공동체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계시된 진리를 공동으로 확인하고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는 공의회가 성경을 넘어서거나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는 자리였다고 강조합니다.

Pelikan은 초기 공의회들을 교회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신학적 사건으로 꼽습니다. 그는 특히 니케아와 칼케돈 공의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무엇을 믿는가’를 분명히 정리하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신자에게 교육하는 체계를 세웠다고 말합니다. J.N.D. Kelly는 공의회의 논의가 단순히 교리의 추상적 명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내린 신앙의 결정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AD 45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한 인격 안에 존재한다는 위대한 신앙의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기독론뿐 아니라, 구속론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에도 에페소, 트리엔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 수많은 회의가 이어졌지만, 초기 7대 공의회는 특히 교리의 기초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의회는 또한 교회의 통일성과 권위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지역 교회나 개별 신학자의 판단이 아니라, 보편 교회 전체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하나의 목소리로 고백한 진리였기 때문에, 그 결정은 이후 세대의 신앙 형성과 교육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공식적인 공의회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교단 총회, 신학교의 교리적 입장, 신조와 신앙고백의 유지와 갱신 등은 모두 공의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정통 교리를 함께 분별하고 지켜가는 공동체적 노력은, 시대마다 새로운 공의회의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결국 공의회는 단순히 ‘회의’가 아니라, 진리 앞에서 함께 엎드려 경청하고 고백한 교회의 신앙 행위였습니다. 교회는 이 같은 전통 위에 서 있으며, 오늘날의 교회 역시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동으로 해석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3. 신경: 정통을 고백하다

공의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단지 문서로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신경(Creed)이라는 형태로 고백되어, 교회 안에서 공예배, 교육, 신앙 형성의 핵심 도구로 자리잡게 됩니다. 신경은 교회가 시대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자, 성경에 기초한 정통 신앙을 요약한 공식 선언입니다. 이는 단지 과거의 교리문답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믿고 가르치며 지켜야 할 신앙의 뼈대입니다.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신경으로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신경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기원후 2세기경 로마 교회의 세례 문답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요약합니다. 니케아신경은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을 반박하며 작성되었고,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에 관한 부분이 보완되어 삼위일체 교리를 보다 분명히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신경은 더욱 정밀하게 삼위일체와 기독론을 설명하며, 정통과 이단을 구분짓는 기준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신경을 “진리의 핵심을 시대와 문화 속에서 간결하게 요약한 교회의 고백”이라 정의합니다. 그는 특히 신경이 신자의 신앙을 형성할 뿐 아니라, 교회의 경계와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는 기능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Pelikan은 “신경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예배 속에서 반복적으로 고백되며 신자들의 영혼에 각인되는 진리의 형식”이라 표현하며, 그 교육적 가치와 영적 실재성을 강조합니다.

신경은 또한 교회의 일치와 연속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 언어, 문화 속에서도 동일한 신경을 고백함으로써 교회는 ‘하나의 믿음, 하나의 주님, 하나의 세례’를 실천적으로 구현했습니다. 중세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전통은 각기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의 주요 신경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신경이 단지 분열의 도구가 아니라, 연속성과 보편성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신경의 중요성을 인정했습니다. 루터는 사도신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신경의 내용을 조직신학적으로 풀어 해설했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은 사실상 새로운 신경에 해당하며, 시대적 상황에 맞춰 복음을 분명히 고백하려는 교회의 응답이었습니다.

오늘날 신경은 점점 예배와 교육 현장에서 잊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신앙의 뿌리를 잃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신경은 단지 암송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도구이며, 교회는 이 고백 위에 서 있을 때에만 정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정통 교리를 견고히 붙들고 시대 속에서 이를 고백하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나 제도적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는 공동체이며, 그 고백이 올바를 때에만 참된 교회일 수 있습니다. 이단을 분별하고,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수호하며, 신경을 통해 정통을 고백하는 일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신앙적 책임입니다.

정통 교리는 고정된 이론이 아니라, 시대마다 살아 있는 진리로 고백되어야 하며, 교회는 그 고백의 등불을 꺼뜨려선 안 됩니다. 우리가 배우고,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할 것은 말씀이 이끄는 고백된 진리이며, 교회는 언제나 그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출처:
1) 루이스 벌코프, 『기독교 교리사』

2) 조병하, 『세계역사 속의 그리스도교 역사』

3)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