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독특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이 교리는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안에서 깊이 고민되고 고백되어 온 신앙의 중심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만이 가진 고백이며,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온전히 담아내는 신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십니다. 각각은 독립된 세 신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하나님 안에 존재하시는 세 위격입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게 반응한 고백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배경과 각 위격—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학적 고백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왜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지, 그리고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는 기둥이 되었는지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1. 성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첫 고백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 축이며, 그 출발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창조주로 계시되며, 전능하시고 자존하시며 인격적이신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고백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첫 구절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하나님은 세상의 기원이자 역사의 주권자로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서 출발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 복수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계시적 진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삼신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오직 하나이심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신 6:4). 그러나 이 하나님은 성부로서 계획하고, 성자와 성령을 통해 실행하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초기 신조들 역시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전능하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을, ‘아버지’라는 표현은 언약적 관계성과 인격성을, ‘창조주’라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론적 근원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한 창조론을 넘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향한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단지 창조의 시작점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의 계획자로서의 기능을 포함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타락 이후 인류를 회복하기 위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신 분이며, 그 계획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사역하십니다. 이러한 구조는 삼위일체적 구속사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며, 교리는 이처럼 계시의 흐름에 따라 발전합니다.
J.N.D. Kelly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교부들의 고백이 초대 교회의 신학을 이끌었던 근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터툴리안 등이 아버지 하나님을 성자 및 성령과 구별되면서도 동등한 신성의 한 위격으로 고백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분명히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Pelikan도 성부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며,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가 단지 역할상의 표현이 아니라, 실질적 관계성의 기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단지 과거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의 신앙과 삶에도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우연이나 혼란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 속에 창조되고 이끌림받는 존재입니다.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성부는 출발점이며, 교회의 모든 신앙과 신학은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참 하나님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의 중심에는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의 사자나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으로 고백됩니다. 이 고백은 단지 교리적 주장이나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후 그분 안에 하나님의 본질이 현존하고 있음을 인식한 역사적 신앙의 결론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로 시작하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할 때, 성자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선언됩니다. 이 본문은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중 하나인 성자의 성육신을 밝히며, 삼위 중 한 위격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건의 신학적 깊이를 드러냅니다.
초기 교회는 이 진리를 이해하고 고백하는 데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며 ‘신적’하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AD 325)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ὁμοούσιος)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었으며, 성자 하나님의 신성이 교리적으로 명확히 확립된 순간이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각각 온전하게 존재하며, 서로 섞이지 않고 한 인격 안에 통일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칼케돈 공의회(AD 451)의 정의와 일치하며, 교회는 이 정의를 통해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분의 구속 사역,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유효하며 효과적인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전제가 됩니다.
Pelikan은 초기 교부들이 성자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어떤 고통과 논쟁을 거쳤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특히 아타나시우스의 사역이 삼위일체 교리 확립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면서, “성자에 대한 고백은 단지 예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을 지키기 위한 신학적 전투였다”고 말합니다. Kelly 또한 초기 기독론의 정교함과 논리적 일관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전체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핵심입니다. 현대 기독교 안에는 예수님을 단지 ‘좋은 사람’이나 ‘윤리적 이상’으로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시며, 기능적으로 구속의 중심이 되십니다.
성자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한다는 것은 단지 옳은 교리를 갖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실제적 믿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두 번째 고백은 바로 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격적 믿음입니다.
3. 성령: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인격적 능력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역사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정교화되었습니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는 구속자로 일찍이 교회의 신앙 속에 자리 잡았지만, 성령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능력’이나 ‘에너지’ 정도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힘이 아닌, 위격을 지닌 하나님으로 계시합니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분(행 13:2), 기도하게 하시는 분(롬 8:26),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고전 3:16)이며, 이는 곧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흔히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예언의 영’ 등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세상에 실행하실 때 사용하시는 능력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임시적 능력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안에 이미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의 씨앗이 존재합니다. 신약에 들어서면서 성령은 점점 더 명확한 신적 위격으로 계시됩니다. 예수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으며(요 14:26), 부활 후에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셨습니다(요 20:22).
오순절 사건은 성령의 본격적 임재와 사역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은 불의 혀같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하며, 교회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때의 경험이 아니라,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안에 포함된 사건입니다. 성령은 교회를 탄생시켰고, 오늘날까지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이끌어 가십니다.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에 대한 논의는 특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에서 정리됩니다. 당시 ‘성령은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한 마케도니우스파의 이단 사상을 반박하며, 교회는 성령이 성부, 성자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사도신경이 “성령을 믿으며”로 짧게 언급한 것에 비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에 대해 “주 하나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라고 상세히 고백합니다.
벌코프는 성령에 대한 오해가 ‘신비한 영향력’ 수준으로 그칠 때 교회의 신앙과 삶이 큰 혼란에 빠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성령이 삼위 하나님의 실질적 위격이며, 성화와 중생, 교제와 사역, 진리의 인도자이심을 강조합니다. Pelikan 또한 성령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현재성”이라 부르며, 성령 없이는 교회도, 신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Kelly 역시 초기 교부들이 성령을 단지 ‘능력’으로 보던 생각에서, 명확한 위격으로 고백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조명합니다.
성령은 오늘날 신자의 삶 속에서 가장 가까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 예배, 회개, 성경 읽기, 교회 공동체의 모든 활동은 성령의 조명과 인도 없이는 무력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성령 하나님을 분명히 고백할 때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삼위일체는 단순히 복잡한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고백하기 위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시며 구속의 계획자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그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구세주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 구원을 적용하시는 능력의 주체이십니다. 이 세 위격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지만, 본질상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벽히 해석될 수는 없지만, 성경의 계시에 충실하게 응답한 교회의 오랜 신앙 고백입니다. 이 교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구속사 역시 왜곡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더 바르게, 그리고 더 전인격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자,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이며, 교회가 하나됨을 고백하는 토대입니다.
출처:
1) 루이스 벌코프, 『기독교 교리사』
2) 조병하, 『세계역사 속의 그리스도교 역사』
3)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