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개신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신정통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 인물인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같은 시대적 위기의식과 계시 중심 신학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바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브루너는 인간 존재 안에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남아 있으며, 일반계시와 자연적 인식이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바르트는 타락 이후 인간 이성은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특별계시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단순한 학술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개신교 신학의 계시론과 선교론, 그리고 문화에 대한 태도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 에밀 브루너의 계시 이해: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계시
에밀 브루너의 계시 이해는 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 그는 계시를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인격적 만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에게 계시란 하나님의 주체적인 자기 표현이며, 단순한 명제적 지식(it-truth)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마주치는 존재적 관계(you-truth)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Ich und Du)' 개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이므로 그에 대한 참된 지식은 '너의 진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브루너는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일어난다고 여겼으며, 이 만남 속에서만 인간이 참된 지식과 구원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격적 계시를 담고 있는 간접적 증언일 뿐, 계시 자체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서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브루너의 계시 이해는 전통적인 정통주의의 계시론과 구별되며, 계시를 성경이라는 문자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인격적 관계의 사건으로 파악하려는 현대적 시도였습니다. 그는 계시의 명제화, 체계화를 신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위험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계시를 '사건'으로 강조했던 칼 바르트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본질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브루너는 인간의 인식 주체성과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과 자기 계시 방식을 동시에 존중하며 계시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2. 자연신학에 대한 브루너의 입장: 제한적 일반계시의 인정
브루너는 신정통주의 신학자였지만, 자연신학에 대해서는 바르트와 달리 보다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1934년 발표한 논문 「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에서 자연신학을 단호히 거부한 바르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브루너는 '자연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의식' 혹은 '일반계시'는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어느 정도 남아 있으며, 인간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견해를 바탕으로 신학적 논증이나 전도, 선교에 있어 이성과 자연의 역할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신학은 인간 안의 '접촉점'을 전제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며, 이러한 최소한의 접촉점이 곧 자연신학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연신학이 구원의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신학적 소통을 위한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에 대해 "Nein!(아니오!)"라는 논문으로 강력히 반박했습니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이 교회의 순수한 복음 선포를 훼손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문화에 기초한 타협적 신학으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브루너의 주장에 대해, 나치즘과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복음이 오염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며 이를 "타협의 신학"이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브루너는 바르트의 이러한 비판에 억울함을 드러내며, 자신이 주장한 일반계시는 어디까지나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정당화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신 존재 증명이나 자연적 논증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을 향한 최소한의 감각'을 말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3. 신정통주의 논쟁의 맥락과 신학사적 함의
브루너와 바르트의 자연신학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신정통주의 내의 핵심적인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신정통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신학 운동으로, 계시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입니다. 바르트, 브루너, 불트만 등이 이 흐름 안에서 신학을 전개했지만,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브루너는 신정통주의의 핵심을 계시 중심 신학, 인간과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이해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과 이성, 문화의 역할 또한 완전히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바르트의 계시 이해가 너무 일방적이며, 인간의 응답 가능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신학이 사회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학은 현실로부터 고립되어 결국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바르트는 신정통주의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지키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문화에 신학이 의존하는 순간, 복음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브루너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이나 가톨릭의 구원론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이 논쟁은 이후 신학계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복음주의권에서는 브루너의 입장을 더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바르트의 입장은 보다 급진적 신학적 순수성을 강조한 모델로 남았습니다. 이 논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연 속에 하나님의 흔적은 존재하는가?', '신학은 사회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에 대해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브루너와 바르트의 논쟁은 단순한 계시론 혹은 자연신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넘어서, 신학이 하나님과 인간, 교회와 사회, 계시와 이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취해야 하는지를 묻는 거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신학이 단지 개념의 싸움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을 향한 책임 있는 목소리여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출처:
1) Emil Brunner, Nature and Grace: A Dialogue with Karl Barth
2) Karl Barth, Nein! Antwort an Emil Brunner
3) T.F. Torrance, Karl Barth: An Introduction to His Early Theology 1910–1931
4) Alister E. McGrath,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5) John Webster, Barth's Moral Theology
6) George Hunsinger, How to Read Karl Barth: The Shape of His Theology
7) Paul D. Molnar, Divine Freedom and the Doctrine of the Immanent Trinity
8) 로저 올슨,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