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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와 상관 신학 (존재론, 문화 해석, 상관 개념)

by 차곡지기 2025. 6. 20.

폴 틸리히와 상관 신학 (존재론, 문화 해석, 상관 개념)

 

20세기 전반기는 전쟁, 산업화, 인간 소외, 실존의 불안 등으로 대표되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철학과 과학은 더 이상 신에 대한 확고한 해석을 제공하지 못했고, 전통 신학은 시대적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신학이 이 위기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신앙이 의미 있게 "응답"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틸리히의 상관 신학(method of correlation)은 인간의 실존적 질문기독교 신앙의 응답 사이에 신학적 상관관계를 세우고자 한 시도입니다. 그는 인간의 절망, 죄의식, 소외, 의미 상실 등의 실존적 조건을 철학적으로 규명하면서, 이에 대해 복음이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존재론, 문화 해석학, 신 개념의 재정립 등 다양한 철학적 도구를 사용했으며, 신학과 철학의 경계를 창조적으로 넘나들었습니다.

1. 존재론으로서의 신학: 실존의 깊이와 신의 초월성

틸리히는 신학을 단순히 교리적 체계가 아닌 존재론적 탐구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학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작업이며, 이 존재론의 중심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Ground of Being)"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틸리히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실존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의 토대입니다. 이는 전통적 신 개념에서의 인격적이고 외재적인 하나님 이해와는 다른, 철학적으로 정련된 개념입니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과 독일 관념론 전통, 특히 셸링헤겔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존재가 본질과 실존 사이의 긴장을 통해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단절성, 죄책감 속에서 불안과 공허를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실존적 조건이 신학적 질문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 조건 속에서 인간은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게 되며, 이러한 갈망은 신학이 응답해야 할 실존적 질문으로 발전합니다.

틸리히는 존재의 깊이(depth of being)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을 인간의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실재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가장 강력한 존재'나 '존재하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근거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능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입니다. 이 존재론적 하나님 개념은 신을 존재론적으로 경험하게 하며, 실존적 불안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신앙적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틸리히의 존재론은 인간의 불안과 단절, 유한성 속에서 신을 묻는 존재론적 질문을 정당화하며, 신학을 그 시대의 실존적 조건 안에서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2. 문화 해석과 신학의 대화: 상징, 예술, 사회를 통한 신적 탐색

틸리히의 신학은 철저하게 문화적 대화의 신학입니다. 그는 "문화는 신학의 형식이며, 신학은 문화의 내용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현대 문화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의 자리임을 강조했습니다. 틸리히는 현대 예술, 문학, 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질문들이 기독교 신앙과의 대화를 통해 심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예술과 문화를 단지 세속적인 표현으로 보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갈망과 신적 초월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 문학에서 드러나는 절망, 부조리, 소외는 인간 실존의 진실한 고백이며, 이러한 절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학적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이를 상징(symbol)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합니다. 상징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문화적 수단으로, 모든 종교적 언어는 본질적으로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와 신학은 뿌리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틸리히는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사회분석, 실존주의 문학 등 비신학적 담론들을 신학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들 문화적 요소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실존의 조건을 드러내는 통로로 활용함으로써 신학이 구체적 삶의 문제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틸리히의 문화 해석은 단순한 '선교적 전략'이 아니라, 신학 자체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신학은 자기 내부에서만 자족하는 교리적 틀로 머물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 내재된 실존적 고통과 욕망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신앙적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자기 갱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3. 상관 개념과 신앙의 해석학: 질문과 응답의 구조

폴 틸리히 신학의 중심은 바로 상관 개념(method of correlation)에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과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대응시키는 해석학적 구조입니다. 그는 철학은 인간의 질문을 제기하고, 신학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둘의 대화와 상호 작용이 바로 상관 관계이며, 여기서 신학은 독단적 체계가 아니라 해석적 작업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상관 신학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인간의 실존적 조건(유한성, 소외, 죽음, 의미 상실 등)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틸리히는 "신앙은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향한 궁극적 관심"이라고 보았으며, 이 궁극적 관심은 실존적 질문 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은 전통 교리가 아니라, 계시된 복음의 진리로부터 제공된다는 점에서 상관은 단순한 수평적 소통이 아니라, 수직적 응답의 형태를 지닙니다.

그의 상관 구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철학적/문화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2. 기독교 계시는 이에 대해 응답합니다.
  3. 신학은 이 둘을 연결하고 해석합니다.

예컨대, 인간이 '소외'를 경험할 때, 틸리히는 이 질문을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로 해석하고, 여기에 기독교는 '화해의 복음'을 통해 응답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학은 정적 체계가 아니라 해석학적 사건이며, 인간 실존과 신적 진리 사이를 연결하는 '해석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관 방식은 신학을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 갱신하게 하지만, 동시에 신앙의 절대성진리의 초월성을 희석시킨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특히 바르트브루너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은 틸리히의 신학이 인간의 질문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신학의 본질적 고유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틸리히는 상관 관계가 복음의 타협이 아니라, 복음의 존재론적 해석 방식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폴 틸리히의 상관 신학은 단순한 학문적 체계를 넘어서, 20세기 현대신학의 흐름을 지배한 중요한 방향성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는 철학, 심리학, 문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언어를 재정립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실존적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복음을 제시한 그의 신학은 당시 절망과 소외 속의 인간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틸리히는 전통 교리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교리를 실존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작업을 통해 그 의미를 현대에 되살리려 했습니다. 존재론적 신 개념, 문화 해석학, 상관 구조 등의 핵심 개념은 여전히 신학적 해석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포스트모던 시대의 신학적 사유에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신학은 계시의 초월성에 대한 긴장 유지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인간의 실존 조건이 신학을 규정하게 될 때, 복음은 인간의 질문에 맞춰지는 상대적 응답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틸리히의 신 개념은 초월적 인격 하나님을 희석시켜, 성경의 인격적 계시 이해와 괴리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틸리히는 현대 신학의 가장 창조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앙과 이성, 교회와 사회, 복음과 문화 사이의 깊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이정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상관 신학은 여전히 교회와 신학이 문화와 시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틀을 제공하고 있으며, 실존의 언어로 복음을 말하려는 이들에게 강력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출처:

 

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umes I–III,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1963.
2) Paul Tillich, The Courage to Be, Yale University Press, 1952.
3) John Macquarrie, Twentieth-Century Religious Thought, SCM Press, 1988.
4) Daniel 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Eerdmans, 2004.
5) David Kelsey, The Fabric of Paul Tillich's Theology, Yale University Press, 1967.
6) Robert P. Scharlemann, The Being of God: Theology and the Experience of Truth, Seabury Press, 1981.
7) Philip Hefner, Faith and the Vitalities of History, Fortress Press, 1966.
8) Paul David Hanson, The Identity of God in the Old Testament: A Review of Paul Tillich’s Contribution, Harvard Theological Review.
9) Raymond F. Bulman & Frederick Parrella, From Trent to Vatican II: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s,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10)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폴 틸리히, 로저 올슨 저, 박규태 역, IVP,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