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신학에서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보수성과 권위주의에 도전하며 현대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도한 대표적 가톨릭 신학자입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하여 교회 갱신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이후 교황 무오류 교리를 비판하면서 로마 가톨릭 권위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의 신학은 단순한 교의 해석을 넘어 현대사회와의 소통, 세계종교 간의 대화, 평화의 윤리를 모색하는 데까지 확장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큉의 사상을 교회 개혁, 공의회 참여, 보편 신학이라는 세 개의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사상이 현대 가톨릭 신학은 물론 개신교 신학에도 어떤 도전과 기여를 남겼는지를 고찰하면서,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평가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1. 교회 개혁: 권위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갱신의 요청
한스 큉은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대표적 신학자입니다. 그는 초기 저서 『공의회, 개혁, 연합』(The Council, Reform and Reunion, 1960)에서부터 교회의 구조적 쇄신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했으며, 전통적 위계 구조와 교황 무오류 교리에 대한 신학적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수직적 위계보다는 수평적 공동체성이 강조되어야 하며, 신학은 단순한 교도권의 해석기관이 아닌 시대의 물음에 응답하는 살아있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교회 모델을 중세 봉건적 유산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공동체로의 회복을 요구했습니다. 이 입장은 1970년대 이후 '해방신학'이나 '기초 공동체 운동' 등과도 일정한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의 비판적 신학은 1979년 바티칸에 의해 공식적으로 '가톨릭 신학자 자격 박탈'이라는 제재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큉은 이 사건 이후 더욱 세계적 발언권을 얻어 교회 개혁의 신학적 상징이자 현대 가톨릭 내 자정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는 "내가 로마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가 복음을 떠나고 있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사역을 가톨릭 교회 안의 개혁운동으로 이해했습니다.
큉의 신학은 단순한 권위 비판에 머물지 않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는 교회를 살아 있는 신앙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해 신학적 담론뿐 아니라 윤리적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로써 그의 교회 개혁론은 정치적 급진주의가 아닌 복음 중심적이고 인격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2.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가톨릭 개혁의 전환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개방성과 갱신을 상징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한스 큉은 이 공의회에 신학 자문위원(Peritus)으로 공식 초청되어 적극 참여했으며, 공의회의 개혁 방향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공의회가 단순한 '교리 보수의 선언'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로의 전환을 위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에서 큉은 성경 중심의 신학, 평신도 참여의 확대, 타종교와의 대화, 종교의 자유 보장 등의 주제를 강력히 옹호했습니다. 특히 그는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교회 일치(ecumenism)'는 가톨릭 내부의 정체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의 실제 결정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후 큉은 점점 더 로마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공의회 이후에도 큉은 『기독교 존재론』, 『그리스도인 실존』 등의 저술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교리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의 소통을 이룰 수 있도록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습니다. 그는 공의회를 "시작에 불과한, 완결되지 않은 개혁"으로 보고, 진정한 성령의 개입은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신념은 그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확장하려는 '포스트 바티칸' 신학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는 공의회를 통해 나타난 교회의 문화적 수용성과 역사적 책무성을 강조하면서, 공의회가 신학자들에게 교회의 개방성과 시대적 책임을 자각하게 만든 '교회의 성숙' 과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3. 보편 신학: 교회 안팎을 아우르는 인간적 신앙과 에큐메니즘
한스 큉의 신학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보편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는 『기독교와 세계 종교들』(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1985)을 비롯해 여러 저서에서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 불교 등과의 대화를 추구했으며, 이를 통해 '보편 신학(universal theology)'이라는 독자적인 시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모든 종교에 '구원의 진리의 파편'이 존재한다고 보며, 참된 신학은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보편적 진리를 밝히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구원의 보편성과 신의 자기 계시의 보편 가능성을 신학의 중심에 둔 시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바르트나 라너와 같은 동시대 신학자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특히 슐라이어마허, 틸리히, 불트만 등 자유주의 계열 신학자들과 철학적 기반을 공유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주장한 '세계 윤리 선언(Declaration Toward a Global Ethic)'에도 반영됩니다. 그는 모든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윤리의 핵심으로 '인간 존엄, 황금률, 평화, 정의'를 제시하며, 종교 간의 갈등보다는 상호 이해를 통한 인류 공동체의 형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포스트모던 신학'과도 연결되며, 교회가 세상의 윤리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열려 있는 공동체로 응답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큉의 보편 신학은 단순한 타종교 관용이 아닌, 인류 전체를 향한 신학적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역할이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인류와의 책임 있는 소통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한스 큉은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가 남긴 사상은 단순한 신학적 담론을 넘어서 교회 실천, 사회 윤리, 종교 간 대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교회의 권위 구조에 비판을 가하면서도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의 내적 개혁을 일관되게 추구했습니다. 큉의 신학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도, 그 그리스도를 통해 전 인류와의 연대를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보편주의'나 '성경 비판'은 분명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 중심성, 신앙과 이성의 조화 추구, 교회의 자기 성찰 요구는 분명한 유산으로 남습니다. 그의 신학은 오늘날 교회가 여전히 마주한 과제들—교회 권위, 신앙과 과학, 문화와의 대화, 세계 윤리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출처:
1) Hans Küng, Does God Exist? (1980)
2) Hans Küng, On Being a Christian (1974)
3) Hans Küng, The Council, Reform and Reunion (1960)
4) Hans Küng, 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1988)
5) Hans Küng, 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1985)
6) Catherine M. LaCugna, The Theological Methodology of Hans Küng (1982)
7) Robert McAfee Brown, Observer in Rome: A Protestant Report on the Vatican Council (1964)
8) David Tracy, Blessed Rage for Order: The New Pluralism in Theology (1975)
9) Richard McBrien, Catholicism (1980)
10) 로저 올슨 저, 박규태 역, 현대신학이란 무엇인가 , IVP, 2020.